보험회사에서 마케팅을 한다는 것 (1)
나는 보험회사에서 근무 중이다. 보험회사의 마케팅은 일반 회사의 마케팅과는 다르다. 소비자에게 잘못된 정보를 주거나 판매율을 높이기 위해 과장 광고를 진행할 경우 소비자 피해가 가장 큰 업종 중에 하나이기 때문이다. 그동안 팽배해왔던 불완전판매로 보험회사는 소비자를 생각한다기보다 회사의 이익만을 취하려 한다는 오해를 얻은 것도 이유가 될 수 있겠다.
특히나 우리 회사는 생명보험회사이기 때문에 손해보험보다 더 엄격할 수 있다. 사람의 생명을 다루는 보험이기 때문이다. 이렇게 규제의 영향을 많이 받는 업종은 대표적으로 은행/증권/보험/의약/의료기기/병원 등이 있는데, 돈과 건강을 모두 다루는 것이 생명보험이니까 그만큼 더 신경써야 하는 것은 맞겠다.
그렇다면 보험회사에서 마케팅을 한다는 것은 다른 업종의 마케팅과는 무엇이 다를까? 크게 세 가지의 어려움이 있다.
‘심의 얼마나 진행됐어요?’
‘몇시까지 피드백 주시면 바로 작업해서 넘길게요’
생명보험 광고 제작물의 엄격한 심의 절차
처음에 입사하고 나서 이렇게나 많은 절차와 관련인이 있다는 걸 보고 놀랐고, 사실 아직 놀라는 중이다. 이 절차는 광고를 집행하자고 마케팅을 고민하는 순간부터 시작된다.
(출처: 금융위원회, 금융광고규제 가이드라인. 2021. 6.8)
먼저 제작부서로 불리는 마케팅 부서에서 광고물을 제작하면 회사안에서 내부심의를 거친다. 금융위원회의 금융광고규제 가이드라인에는 단순히 준법감시인 확인이라고 되어있는데, 여기서 준법감시인은 ‘내부 통제기준’의 준수 여부를 점검하고 내부 임직원이 그 기준을 위반하는 경우 보고하는 사내 감사 인력이다.
준법감시인이 없을 때 그를 대체할 수 있는 인물은 감사 임원이거나 혹은 대표이사이기 때문에 그 중요성은 더 말할 필요는 없겠다. 하지만 광고 심의 절차에서 준법감시인은 최종적으로 검수를 확인하는 결정권자일 뿐 그 안에 수많은 유관부서가 있다.
소비자를 대상으로 하는 상품 광고이기 때문에 금융소비자를 보호하는 역할의 부서에서 확인을 받고, 상품을 개발한 상품 부서에 확인을 받는다. 또한 브랜드를 대표하는 광고물이니, 브랜딩 책임 부서에서도 확인을 받고 각 부서의 실무자는 물론 임원의 확인도 받는다.
이 과정에서 모든 부서의 의견이 승인난다면 더 할 나위 없이 좋겠지만 안타깝게도 마케팅 관점에서 보는 광고물의 적합도와 각 부서에서 보는 광고물의 적합도는 모두 다르고, 필수 사항도 모두 다르기 때문에 보통 피드백을 받게 되며 수정 심의 기간이 추가된다.
(출처: 한국소비자원 정책연구실, 홈쇼핑 판매 보험광고 실태조사, 2010년 5월)
이렇게 여러 유관부서의 내부 심의를 받게 되면 생명보험협회 광고 심의 위원회의 심의를 받는다. 위원회는 1명의 위원장과 7인의 위원으로 구성돼있으며 1명의 협회 임원, 1명의 학계 교수, 2명의 소비자단체 변호사 및 임원, 1명의 언론, 2명의 업계 임원으로 구성돼있다.
협회 위원회를 거치는 어려운 이유는 일정 때문이다. 매주 수요일 하루동안 접수된 모든 생보사의 광고제작물을 일주일동안 검토한다. 그리고 접수 차주 화요일에 결과를 통보한다. 모든 생보사의 광고 제작물을 검토하는 어려움이 만만치 않음을 이해하나, 마케터 입장에서는 귀한 일주일을 꼼짝없이 기다리게 되는 것이다.
물론 이 기간동안 광고물 정보에 영향을 끼치지 않는 작고 디테일한 디자인 개선은 이뤄지지만 큰 수정은 어림도 없다. 엄격한 내부 심의를 거친 제작물은 협회 심의에서 아예 반려가 나는 경우는 없다고 한다. 수정은 있을 수 있으나 수정심의는 보통 하루 이틀이면 끝난다.
그럼 내부심의에서 준법감시인필 심의번호와 협회 광고 심의 번호를 부여받게 되고 그 번호를 광고 제작물에 일일이 추가하고 나면, 광고 라이브를 할 수 있다.
만약 회사가 그룹사의 영향을 받는 회사이거나, 일반 마케팅 회사에서 받는 내부 보고 절차가 있다면 그 모든 절차를 거치고 난 후 내부 심의 및 협회 심의가 진행되는 거니, 상상해보시라. 본인이 진행하고 있는 보고 절차에 내부 심의와 외부 심의가 추가된다는 것을.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일을 한다
월급 받았으니 그 값은 해야지.
처음에 입사하고 나서 이 절차들을 처음 겪었을 때에는 너무 불필요하고 어렵고 난해하고 복잡하고 시간만 소요되는 단계들이라고 생각했다. IT 스타트업에서 근무한 나로서는 더 그랬던 것 같다. 팀장님과 대표에게 메신저로 편하게 논의하면 됐으니까. 여기에서는 문구는 물론 디테일한 디자인 요소 하나하나까지 다 피드백을 받는 절차에 곤욕스러웠던 것도 사실이다.
절차는 사실 크게 문제가 안 된다. 소비자에게 마케팅이나 광고해서 생길 수 있는 이슈를 다양한 사람들의 시각에서 미리 피할 수 있고, 예기치 못한 이슈들을 미연에 제거하고 온에어할 수 있으니까 ‘안전한’ 광고를 할 수 있는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가장 큰 문제는 타이밍이다. 사전에 광고를 제작하고 콘티를 짤 때부터 광고를 제작하고 나서 심의 반려가 나면 안 되니까 일일이 보고를 하고 미리미리 이슈를 파악한다. 그리고 나서 심의를 다 받을 때쯤 확인해보면 두 달은 지나있다. 이슈를 활용하거나 따를 수 있는 광고는 진행하기 쉽지 않다. 그간 당신이 보아왔던 생명보험 광고를 떠올리면, 대부분 브랜드 이미지나 이슈와 상관없는 광고가 대부분일 것이다.
한편으로는, 심의나 절차를 진행하면서 프로젝트 스케쥴링 능력이나, 수많은 유관부서와의 커뮤니케이션 능력, 보고받는 사람에 따라 이슈를 설득하고 업무를 이해시키는 다양한 방법, 또한 이 복잡한 절차를 이해하고 각 단계에서 해야하는 일들을 알고 있다는 점도 또 하나의 경쟁력이 될 수 있다.
다른 회사로 이직하게 된다면, 그 회사 내부의 절차나 내외부 절차는 이제 어렵지 않게 적응할 수 있지 않을까, 하고 이 경험이 도움이 되길 바라본다. 나중에 잘 사용할 수 없더라도, 지금은 일단 이 자리에서 최선을 다하는 수밖에.
이외에도 두 가지의 어려움이 더 있는데, 다음 글에 소개하도록 하겠다.